박영하 , 詩情이 내면화된 공간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서 성록 ( 미술평론가 )

박영하 씨를 생각할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그가 우리나라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모노크롬 회화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화가라는 사실이다 .
어떤 서술도 해독도 거부하는 모노크롬 회화를 긴 세월 동안 추구해왔다 .

작품이해에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현대회화를 우리 정서에 맞게 고양시킨 그림을 꼽자면 역시 모노크롬을 빼놓을 수 없다 . 이 회화경향은 순화된 조형언어로 우리 회화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은 바 있다 . 그런데 모노크롬 회화를 촉발시킨 ‘ 6. 25 세대' , ‘ 4. 19 세대'에 이어 ‘청바지 세대'의 작가로 이 회화를 계승한 사람이 바로 박영하 다 . 햇곡식을 거두어드릴 때의 흐뭇함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평면과 무던히도 대결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.

그가 모노크롬 회화를 의도적으로 지향해왔다고는 보지 않는다 . 어떤 양식의 추종자라는 뜻도 아니고 애써 이 양식을 보존하려 했다는 뜻도 아니다 . 모노크롬이 그의 취향과 정서에 딱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. 그런 의미에서 모노크롬은 행운이었고 그가 모노크롬에서 쉽게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. 그가 좋아서 선택한 회화이기에 양식의 틀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이 회화를 요리해왔다 . 균질의 평면을 떠나 요철효과가 두드러지고 , 붓에 의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, 에폭시나 흑연 , 미디엄 등 여러 재료에 의해 양괴감이 전면에 나타난 것은 모노크롬과 사뭇 대조되는 특징들이다 . 같은 모노크롬이더라도 박영하 씨는 이 회화를 자기에 맞는 양식으로 발전시켜왔다 . 바로 이것이 그의 작품을 높이 사는 이유 중 하나다 .

농부에게 추수하는 기쁨이 있듯이 화가는 작품을 완결했을 때의 기쁨으로 작업을 한다 . 그러나 논밭을 가꾸는 것이 힘들 듯이 화가도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. 애써 지은 농작물에 병원균이 끼어들어 꼼짝없이 재해를 입는 것처럼 화가도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일을 그르칠 수 있다 . 그래서 마음으로는 꼭 성공작을 남기고 싶은데 실제로는 번번히 실패를 하는 경우가 있다 . 둘 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. 결실을 맺는 것은 이처럼 낭패의 정글을 통과할 때 얻어지는 것 같다 . 그러나 수확의 기쁨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에 낫과 붓을 놓지 않는다 . 농부에게나 화가에게나 고생 뒤에 찾아오는 보람은 그래서 그 정도가 더 큰지 모른다 .

 

화가와 관객

 

1980 년대 초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작가는 무려 57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니 그의 예술적 열정과 경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. 그의 뛰어난 재능은 일찍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 총망 받는 화가로 평가를 받았다 . 대한민국미술대전의 대상을 수상 (1988) 하거나 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로 선정 (1991)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.

박영하 씨는 1990 년대 이후 국내무대보다는 국제무대로 외연을 넓혀왔다 . 베를린 , 멜버른 , 요코하마 , 함부르크 , 상해 , 북경 등 국제적인 규모의 아트페어참가를 비롯하여 1992 년부터는 시드니에 있는 애넌데일 (Annandale) 갤러리 전속작가로서 왕성한 작품발표를 해왔다 .

일년에 반절은 전람회 관계로 외국에 나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내 활동은 뜸했던 것 같다 .  처음에는 모험에 가깝게 보였던 그의 결단이 지금 와서 보니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판명되었다 .

그는 말 수가 별로 없는 과묵한 작가이다 . 얼핏 보면 무뚝뚝해 보일 수도 있다 . 그러나 작품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딴 사람이 된다 .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. 받아 적기도 힘들 정도로 말의 속도도 빨라지고 어조도 뚜렷해진다 . 역시 ‘그림'이란 말만 나오면 눈동자가 반짝이는 얼굴표정으로 미루어 천직이 화가인 것을 알 수 있다 .

박영하 씨의 말에서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. “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”는 필자의 질문에 “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”고 했다 .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. 짧지만 명료한 그의 말이 오랜 여운을 남겼다 .

박영하 씨처럼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, 속이 깊은 화가도 드물다 . 자기중심적이기 쉬운 미술가의 생리에 비추어 의외의 발언이 아닐 수 없다 . 대개의 경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오인한다 .

박영하 씨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. 그것은 시선을 한눈에 잡아끄는 산뜻한 매력은 없어도 정감이 훈훈하게 넘쳐나고 , 그래서인지 작품을 다 본 뒤에도 자꾸만 잔상이 남아 오랜 기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.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고 기억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. 감상자를 향한 따듯한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. 작가가 자기 작품을 보아줄 감상자에게 호의를 가지면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도 따듯한 반응을 보낸다는 것이다 . 

박영하 씨는 관객이 있기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. 사실 작품을 최종적으로 완성시켜주는 주인공은 작가가 아니라 관객이다 . 관객이 없다면 예술작품은 존립근거는 말할 것도 없고 존재가치마저 잃게 된다 . 그러기에 예술가가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그들 곁에 있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. 관객은 단순한 소비자라는 관념에서 탈피하여 예술의 둘 도 없는 파트너라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. 작품이 진정한 인간이해에 뿌리를 두지   않는 한 ‘예술가의 독주 ( 獨走 ) '는 자폐적 언어게임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.

 

물질속에 침잠된 언어

 

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.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은 여인을 보듯이 , 유구한 세월을 비바람과 싸우며 그 자리를 지켜온 듬직한 바위처럼 그의 작품은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.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표면 , 수더분한 물질감 , 자연적 색채 등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배려가 작품 곳곳에 묻어나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박영하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.

화면에는 덤덤한 색깔에 , 소탈한 물질에 , 수수한 구성이 펼쳐져 있다 .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거나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끌어내려는 흔적을 읽어볼 수조차 없다 .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며 세상이 속절없이 바뀌어도 변덕을 부리지 않고 우리 곁을 지키는 산천과 같다 . 따듯한 마음으로 세상을 품으면서 사람들에게 친밀함을 나누어주고 심적인 휴식을 제공한다 . 핏줄을 곤두세우며 내세우지 않아도 절로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작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.

고요함이 있고 , 신선한 청량감은 아니더라도 안도의 휴식 같은 것이 있다 . 이와 함께 조급함보다는 기다림이 , 재치보다는 우직함이 , 야박한 경계 긋기보다는 너그러운 감싸안기가 각각 우위를 차지한다 . 청태가 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 .

  풀리지 않는 궁금 점도 있다 . 추상작품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딜레마 같은 것이다 .

얼핏 박영하 씨의 그림을 보면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. 보이는 것 ,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외현되는 것에 관한 부정이랄까 ,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관한 부정 때문에 그의 회화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 곤란을 겪게 한다 .

과연 그의 회화는 정말로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가 ?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. 그의 작품은 겉으로 표현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언급한다 . 다만 그것이 비 형태적인 물질 속에 침잠된 언어로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어 시선을 끌지 못할 따름이다 . 쉽게 말해 작가가 뜻하거나 표출하려는 내용이 물질 속에 구금되어 있기 때문에 섬세한 주의력 없이 그의 작품은 이해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. 작품의 이면을 뒤집어 그것을 찾아내는 몫을 관객에게 맡겨놓은 셈이다 . 따라서 호기심 많은 감상자라면   그의 작품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작의 ( 作意 ) 를   파악해볼만 하다 .

흔히 추상미술하면 차갑고 인위적이기 쉬운데 박영하 씨는 예외다 . 들판에 깔아놓은 멍석을 보듯이 편안하고 느긋하다 . 색깔은 시골집의 흙벽을 연상시키고 분위기도 일부러 ‘시골티'를 고집하고 있는 듯하다 . ( 안성에 머물러 작업하고 있기 때문에 전원적 , 자연적인 체취가 묻어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른다 ) 그러면서도 공간의 내밀함이 깨어지지 않거니와 오히려 ‘정감의 두께'를 쌓아올린다 . 굳이 ‘한국적 정서'란 표현을 쓸 필요도 없이 이러한 특징은 이미 박영하 씨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져 있다 .

그의 작품은 구차한 꾸밈을 배제하고 있다 . 미욱한 시골소년의 풋풋함을 보고 있는 듯하다 . 인위적인 강제나 맵시 같은 것을 멀리하는 대신 자연스러움과 미완형의 묘미를 십분 살려내고 있다 . 억지를 버린 자태가 거북스럽지 않고 정겹게 다가온다 .

재료에서 형상까지 그의 작품 속을 관통하는 특징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. 번지르르한 외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박영하 씨는 외모보다는 수수함과 소탈함을 강조한다 . 겉모양보다 내면을 , 과시보다는 성실성을 더 소중히 여긴다 . 우리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중요한 덕목을 환기해주는 듯하여 고맙다 .

그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.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주위의 눈치를 크게 볼 것도 없다 .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을 뿐이다 . 그런 점에서 박영하 씨는 자신의 소탈한 마음씨를 형용하고 있지 않은가 본다 . 작업은 그 사람의 성정 ( 性情 ) 을 닮는다고 한다 . 이 말은 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. 그림에서 배어나는 담담한 정취가 꼭 그 주인과 닮았다 .

이와 함께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우리 마음속에 잊혀진 것들이 슬그머니 일깨워진다 .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 , 침묵에 잠겨있는 들판 , 하늘의 별 , 고향집의 초가집 정경들이 오버랩되어 다가온다 .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아련한 흔적들을 떠올리게 한다 . 초봄 햇살에 온갖 식물들이 얼굴을 씻듯이 우리 마음도 그의 작품을 보면서 오롯이 솟아난다 .

 

삶의 공간

 

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은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, 그의 작품은 윤기가 없다 . 윤기란 좋게 말하면 살아 있는 존재의 활기와 연결되지만 물질의 표면으로 보면 거부감을 줄 때도 있다 . 작가는 이런 측면에서 광택을 피한다 . 사람들의 시선이 표면을 넘어 이면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다 . 수용성을 갖게 하기 위해 무채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.  바탕에 수성안료를 사용하거나 흑연 , 흙 , 먹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화면에 시각이 집중될 때 반발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. 이와 함께 편안한 감정을 주기 위해 화면 가장자리에 묻어 있는 물감이나 재료를 그대로 살려낸다 . 자연스러운 효과의 극대화랄까 , 무심한 표정에는 아집에 얽매는 대신 순리대로 살고자 하는 그의 인생관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.

그의 회화는 물감을 겹겹이 쌓아올려 평면의 견고성을 유지한다 . 근작에서는 붓 자국의 흔적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. 물론 표면에 무언가로 긁힌 흔적 혹은 균열된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면은 대체로 물질화되어 있는 양상이다 . 그런데 질료를 구사하여 울창한 ‘물질의 수목 ( 樹木 ) '을 조성하면서도 자체에 목적성을 두기보다   거기에서 무언의 발언을 이끌어내고 있다 . 그 무언의 발언은 너무나 조용하고 조심스러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. 호흡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여 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, 곧 감성의 떨림이다 .

이 일 선생은 일찍이 박영하 씨의 회화를 ‘감성의 회화'로 명명한 바 있다 . 직관과 느낌으로 충만한 평면의 상태 , 바로 이것이 그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특이점이라는 것이다 .

 

“ 박영하 의 회화는 바로 감성의 회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. 그러나 그것은 이를테면 말레비치에 있어서처럼 정화될대로 정화된 지고의 감성은 아니다 . 그것은 오히려 일상적인 삶에 순응하여 굴절을 일으키는 감성이며 그 굴절의 억양이 때로는 순박하게 때로는 투박하게 화면에 투영되는 것이다 . 또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자유롭게 숨 쉬는 삶의 공간일 수가 있는 것이다 . ” ( 이 일 , “상을 그리는 회화” , 1986 년 )

 

‘소박하면서도 자유롭게 숨 쉬는 삶의 공간'으로서의 평면 , 바로 이것이 그가 지금까지 끈질기게 추구해온 회화적 지향점으로 모아진다 . 작가는 이 같은 면모를 굳건히 지켜왔다 . 삶의 언저리에서 느낀 내면의 감정들을 줄곧 화면에 실어왔고 그 감정을 소중히 여겨왔다는 평가이다 . ‘사건일지'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에게 있어서는 자그만 ‘감정의 미동 ( 微動 ) '도 얼마든지 소중한 예술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.

 

감성의 회화

 

이와 같은 모색은 그가 미술계에 데뷔한 80 년대부터 시작되었다 . 그 무렵 작가는   커다란 색면 대비와 , 캔버스 바탕과 표면의 관계성을 탐구하는데 부심했다 . 브라운과 불그스레한 노랑이 주조 색을 이루면서 작가는 화면을 크게 두개 내지는 세 개로 면 분할을 시도했다 . 그러나 그의 면분할은 처음부터 계산된 것을 끝까지 지켜가는 식은 아니었다 . 철저한 평면인식에서부터 출발하기는 다른 작가와 마찬가지지만 ,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의하여 밀어붙이는 대신에 색깔에 대한 자신의 감수성과 감성표출의 마당으로서 평면을 풀이해갔다 .

이것은 화면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형적 특성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. 하나는 면 분할을 기하학적으로 나누는 대신에 자유로운 비정형의 모양으로 남겨두고 있다는 데서 , 다른 하나는 화면 구석구석에 드로잉을 추가함으로써 기계적이고 무감각한 평면을 가급적 탈피하려는 흔적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.

이러한 드로잉적 요소는 80 년대 중반에 가장 두드러졌다 . 추상표현주의를 방불케 하는 강렬한 몸짓 , 열정적 파토스 , 범람하는 서법 , 형태파괴의 과감성 등이 여지없이 표출되었다 . 그에게 있어 가장 색 효과와 제스추어 활용이 적극적으로 기용된 시기였다 .

이런 표현주의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추상표현주의 풍의 화가가 아니다 . 그의 표현의식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‘표현'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화면의 동적 리듬을 부분적으로 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. 말하자면 평면의 고유성은 그대로 간직한 채 여러 색조와 행위를 덧붙인 셈이다 . 이것은 어쩌면 그가   표층구조보다는 심층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얘기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.

1980 년대 말 그의 작품은 일련의 평면탐사 작업을 매듭짓고 , 바탕과 표면이 하나가 되는 통합성을 띠게 된다 . 화면의 모든 요소들은 평면의 이차원성에 수렴되는가 하면 색조에 있어서 엄버나 브라운 등 단일색조를 기조로 삼게 된다 . 간혹 운필 또는 드로잉을 사용하여 화면에 활력을 넣기도 하고 또는 화면정황에 파격효과를 자아내기도 했다 .

1990 년대 이후부터는 물질성을 한층 자유롭게 한다 . 1998 년 미국 엘렌 킴 머피 (Ellen Kim Murphy) 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의 경우 이런 특색이 현저해졌다 . 말하자면 단색으로 채색된 캔버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, 화면 전체를 물들이는 다갈색 모노크롬은 그 어떤 이미지도 거부하는 ‘본연의 빛깔'이었던 것이다 .

이와 함께 네모의 규격에서 벗어나 원형의 캔버스 , 그리고 사각 캔버스라 해도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공간을 확대시키려 했다 . 색깔은 어두운 심해의 풍경처럼 깊은 잠에 빠졌으며 비정형의 이미지들을 공간에 희미하게 아로새겼다 . 그 이미지들은 별 의미 없는 기호일 수도 있고 평면을 수식하는 가벼운 언어일 수도 있다 . 그 같은 이미지들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평면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.

대부분 작가들이 어수선한 90 년대의 시대상황을 맞아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에도 그는 막무가내로 한 길을 고집해왔다 . 바깥에서는 신표현주의와 뉴이미지가 불어오고 안으로는 형상미술의 바람이 거세게 불 때에도 끄덕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. 위기를 느낀 추상미술가들이 변신을 꾀할 때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. 버티기를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더욱 내실을 다져갔다 . 지금 생각하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. 두둑한 배짱이 아니라면 버틸 수 없는 강심장의 소유자이다 .

그는 위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저력을 지녔다 . 웬만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든든하고 굳건한 회화양식을 구축해왔다 . 모색과 방황의 시간이 길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작가의 조형의식이 뚜렷했다는 반증이 된다 . 동시에 그것이 외부의 어떤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. 본인의 성향에도 맞고 순화된 미의식을 겸비한 최상의 조합을 일찍 발견하는 예는 흔치 않다 . 다행스럽게도 박영하 가 바로 그 흔치 않는 경우에 속한다 .

박영하 씨의 작품이 지닌 매력이라면 , 바로 중후한 화면에 실려 나오는 자신의 독특한 감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. 즉 모노크롬 회화에서 종종 엿볼 수 있는 ‘방법개발'이나 ‘논리성'에 치중하기 보다는 자신의 풍부한 감성에 의존하여 화면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. 다른 단색화가 주춤하고 있는 사이 그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회화의 논리에 속박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감성을 탐구하는 틀로 단색화를 인식했다는 데 있다 .  양식의 지배를 받는 대신 적극적으로 양식을 운용할 줄 알았다는 이야기다 . 그렇기 때문에 양식에 매이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노크롬이 침체할 때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켜올 수 있었던 것이다 .

 

정서적 운율'의 심화

 

박영하 씨는 2000 년 이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. 스타일의 정형성에 빠지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세계를 탐구해갔다 . 그만큼 자신의 작품에 엄정한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. 작품기조는 바뀌지 않은 것 같다 . 작품의 질적인 측면을 꾸준히 보강하면서도 작품경향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. 어느 작가든 수 십 년간 작품의 일관성을 지켜오기는 쉽지 않다 . 누구나 한 두 번씩은 자기가 하는 것이 지겨워서라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. 그런데 박영하 씨에게는 그런 낌새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. 자연을 닮아가고 그 자연에 작가의 숨결을 불어넣는 그만의 외로운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.

그 뿐인가 ? 그의 작품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내밀성을 듬뿍 머금고 있다 . 은밀한 속삭임의 공간이요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.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고 , 애써 설득하려고 들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으며 , 굳이 외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친화적인 공간이다 .

과묵한 그의 성격처럼 그의 회화는 묵묵함과 덤덤함의 독특한 채취를 풍긴다 .  무뚝뚝하지만 정감이 듬뿍 배어 있는 뚝배기가 맷돌을 보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. 물론 그런 특성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미니멀 아트와 다른 맥락에 속해 있다 . 묵묵함과 덤덤함으로 요약되는 표정의 이면에는 물질의 비 활성적 성질을 평면의 주요 계기로 삼기 보다는 작가 내면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정서적 층위를 가르는 심상 표출에 대한 어떤 각별한 관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.

심적인 것의 표출 , 화면에서 정서를 이끌어내는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붓놀림이다 . 사실 작가는 초창기부터 질료 요리와 아울러 운필을 꾸준히 구사해왔다 . 운필은 그의 작품에게 있어 중요한 조형언어중 하나이다 . 붓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고 빗자루나 막대기 , 심지어 봉걸래를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운필의 효과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.

그의 붓놀림은 선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은 아니다 . 일종의 드로잉이요 , 더 정확히 표현하면 몸짓의 흔적으로 자리 매김된다 . 그래서 붓을 사용하더라도 ‘선적인 요소'가 남게 될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. 선 위에 다른 선이 덧붙여지고 , 그리하여 춤추는 선들이 군집을 이뤄 공간을 술렁이게 만든다 . 무수한 선들을 보면 흩날리는 바람을 보듯 설레이는 마음의 상태 , 먼 나라에 대한 기억의 아지랑이 , 즐거운 연회 한마당을 각각 연상하게 된다 .

그의 작품은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질서감이 있고 , 중심이 휑하니 비어있는 것 같지만 중심이 잡혀 있으며 , 들쑥날쑥한 것 같지만 기조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.  과도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적절히 균형과 신중함을 지키면서 공간을 구축해간다 .

그의 작품을 떠받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. 고즈넉한 평면에 섬세한 ‘정서적 운률'을 보탬으로써 공간을 한층 내면화시켜가는 것이다 . 공간의 내면화를 심도 있게 진행할수록 질료는 좀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간다 . 그래봐야 질료에 불과하지만 풍부한 감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은 의사전달의 매개를 담당해준 질료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.

세월의 흐름과 함께 ‘정서적 운율'이 더 깊게 익어간다 .